[칼럼]교사 정재훈의 “꼰대가 바라보는 세상이야기” EP 3.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2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국가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그에게는 쟁쟁한 라이벌이 생긴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구, 박헌영, 여운형, 김일성, 김규식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자 이승만은 득세를 위해 전략을 펼친다. 해방 직후 우리는 미군정기에 들어가며 극심한 좌우대립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 때 가장 크게 활약한 사람은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 종전 1년 전부터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해방 직후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한반도의 자체적인 통치 질서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신탁통치를 둘러싼 갈등 안에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극심한 혼란이 빚어졌다. 이 틈을 타서 이승만은 잽싸게 미국의 편에 붙었다. 미국의 나팔수 역할을 하면서 반공을 주장하였고, 미국을 이용하여 친일 세력들을 자신의 수하에 넣었다. 그로 인해 38선 이남 지역은 반공이라는 정책 앞에 친일 세력들이 다시금 활개를 치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앞잡이를 했던 군인, 순사, 정치인, 공무원, 경제인들은 그대로 옷만 바꿔 입어서 이승만 편에 서게 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대한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얼마나 기회주의자였던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형선고를 받은 1급 친일인사였던 노덕술에 대해 이승만은 투철한 반공인사를 반민특위가 탄압한다고 비판한 것을 보면, 그가 권력이라는 욕심 앞에서는 정의라는 것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구속된 300여 명의 1급 친일파들은 풀려나 옷을 갈아입고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가 불의를 알면서도 친일파와 가까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라이벌들은 민족이라는 든든한 지지자가 있었던 반면, 오랜 시간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했던 그에게는 지지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 괴뢰정부를 세워줄 인물이 필요했고 이승만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이해관계가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외친 반공은 친일파들에게 과거 반민족 행위를 했던 치부를 가려주는데 굉장히 좋은 방패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미국과 친일세력이라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고, 여순사건, 제주 4.3 사건 등을 일으키고 김구, 여운형 등의 민족인사들을 처단함으로써 남쪽에서 독보적인 1인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같은 시기 38선 이북에서는 친일인사를 처단하는 활동이 숨가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사리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신했던 친일파들은 속속 구속되어 사형을 당했고, 그로 인해 친일파와 지주, 자본가들은 남쪽으로 목숨을 건 탈주를 하였다. 북한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정부 수립 초기에는 부끄럽게도 북한보다는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것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북한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것이며, 그에 대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무지한 국민들을 선동해서 그렇다고 했지만 결국 그를 선택한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치부를 가리기 위해 우리는 오랜 독재와 그들이 했던 반공놀음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사이 친일의 뿌리는 점점 깊게 뻗어가며 우리 정치와 경제 기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치의 틈바구니에서 친일세력들은 자본을 무기로 반공을 외치며 더 많은 이권을 챙겼으며, 부정축재는 넘쳐났다. 2세대 3세대 친일세력들은 그의 부모들이 물려줬던 막대한 재산으로 대기업을 경영하거나 지역 유지로 자리 잡게 되었고, 친일 지식인 후손들은 공공연하게 일제 강점에 대해 미화를 하고 있다. 국민의 눈과 귀가 되고 있는 언론사 인사들의 구성을 보면 친일행적 또는 친일파 후손이 많다. 그들은 은연중에 국민들에게 조선이 무능해서 일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전파하며, 이에 반기를 드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질책을 했다. 얼마 전 개봉된 ‘귀향’이라는 영화를 보면 우리 사회에 친일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 한 ‘귀향’은 다른 영화와 달리 투자자를 찾기 힘들었다. 스토리도 확실하고 우리 민족정서에 부합하는 영화라서 흥행은 보증수표였지만 투자회사들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영화에는 도박적인 투자를 서슴지 않던 투자회사들이 이런 탄탄한 스토리가 있는 영화에는 투자를 하지 않았을까? 결국 투자자를 찾지 못한 감독은 국민 모금을 통해 제작기금을 확보했고, 그래서 이 영화는 14년 만에 개봉하게 된다. 출연자들의 게런티가 적어 A급 배우는 섭외도 못했으며 일부 출연자들은 재능기부를 하기도 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을 앞둔 귀향은 또 한 번 벽에 부딪친다. 전국 개봉관은 44개. 메이져 영화관들은 개봉을 허락하지 않았고 중소 영화관들 위주로, 상영관 수도 적고 상영 기간도 짧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웬만한 지역에서는 보기 힘들었다. 별 것 아닌 영화에 개봉관을 활짝 열어 1000만 관객 몰이를 하던 메이져 영화관들의 행태를 봤을 때, 귀향에 대한 그들의 차가운 시선은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북한보다 잘 살고 있다는데 위안을 삼고 있지만 민족정기의 측면에서, 정의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최소한 건국 초기는 우리가 북한보다 잘 한 것이 없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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