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엔 화폐의 주인공과 우리의 역사 #3
우리는 중국의 인접해서 오랫동안 중국의 문화와 우리 문화를 접목해서 발전시켜왔다. 중국의 영향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중국과는 매우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도 많이 있다. 중국이 수천 년 동안 세계 최고의 문명수준을 가진 것처럼 우리도 그에 준하는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외국의 문화를 자체적인 정화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중국을 통해, 또는 자체적으로도 중앙아시아, 중동, 일본, 러시아와도 교류를 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면서 우리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선 말에는 실학자들이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문물들이 전해지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할 당시는 우리 조선의 국력이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극도로 약화된 상황이었고, 이와 맞물려 서양 제국주의의 물결이 아프리카를 거쳐서 아시아로 닥치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기계화를 갖춘 서양의 군사력 앞에서 아시아의 강국들은 하나둘씩 무너졌다. 일본도 이 무렵 미국의 페리 제독에게 강제적으로 개항되었다. 아시아 각국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병인양요, 신미양요라고 불리는 열강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며 선방하였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는 통상을 빌미로 식민지를 건설하는게 목적이었으므로 서양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은 식민지로 되는 지름길이었기에 우리는 섣불리 그들과 통상을 할 수 없었다. 서양세력에게 위기를 느낀 중국은 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 등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기존의 문화적 토대와 보수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급격한 근대화가 어려웠다. 하지만 일본은 기존의 문화적 토대가 매우 빈약했기 때문에 급격하게 들어오는 서양문화에 대해 필터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었던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긴 하였지만 그 부작용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었다. 오랜시간 동안 이어진 그들의 욕심으로 인해 결국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만들며 일본이 근대화를 하기 전 시점으로 돌아갔다. 이 상황에서 일본이 세계 최강국으로 거듭나게 된 것에 대해 그들의 저력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들 자구적인 노력보다는 외부의 영향이 컸다. 냉전시대에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일본은 상상할수도 없다. 두 전쟁 인접국으로서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로 인해 일본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본 국민들의 근면성과 능력이 한몫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외부적 요인이 없었다면 내부적인 노력을 통해 선진국이 되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국민성을 이야기하자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우리나라만큼 대단한 국민들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결코 일본보다 못나서 선진국이 안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시대적 조류를 운 좋게 잘 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은 최근 평화헌법을 수정하는 등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핑계로 우경화를 하고 있다. 미국의 우방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수십 년 간 이어져 왔던 경제붕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일본의 아베 총리는 엔저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일본 국내경제에서 부작용이 속출하고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한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일본은 의도적으로 우경화를 하고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본은 자국의 힘만으로 선진국이 된 것은 아니고, 게다가 일본이 지금 하고 있는 우경화 정책은 역사의 반성을 하지 못한 위험한 도박을 다시 하는 것이다. 당장은 위기를 타개할 방책으로 우경화를 꺼내들었지만 그 칼이 얼마나 커져서 세계평화를 또 다시 위협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본은 임진왜란때부터 지금까지 정상적인 국가성장의 과정을 겪은 나라는 아니다. 우리는 섣불리, 그리고 단순하게 일본의 성장을 우리와 비교해서 우리가 마치 무능하다는 인식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은 우리가 지향하는 올바른 모델은 절대 아니다.